[ ] [CEO를 위한 동화] 독 안에 든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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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성원 작성일20-03-25 09:29 조회94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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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안에 든 쥐
<**쥐의 해를 맞이하여 '독 안에 든 쥐'를 모티브로 CEO를 위한 동화를 지어봤습니다. _ 허성원 변리사>
제법 똑똑한 시궁쥐 한 마리가 있었다.
이름은 '시이오'라 불리웠다. 시궁쥐의 '시'씨 가문에 스무다섯 번째로 태어났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이름을 보고 스물이 넘는 형이나 누나가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맏이가 되어 있었다. 형과 누나들 모두가 죽고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고양이나 사람에게 잡혀 죽고 몇몇은 굶어죽었다. 하지만 죽은 형제자매들의 수보다 더많은 동생들이 태어났다. 동생들 이름은 똑똑한 그가 나서 고집을 부려 촌스럽게 숫자 따위로 짓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생들은 시티오, 시엠오, 시피오, 시알오, 시에프오 등으로 좀 있어보이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시이오에게는 절실한 꿈이 있었다.
그것은 삼시 세끼 배곯지 않고 누구에게도 잡아먹힐 걱정이 하지 않는 삶이었다. 형과 누나들이 굶어죽고 잡아먹혀 죽는 것을 보면서 삶이라는 것이 가이없는 고해임을 뼈저리게 느낀 탓이다. 그건 사실 모든 시궁쥐들에게 공통된 꿈이다. 환경이 좋은 곳간에 사는 곳간 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소박한 꿈으로 보이겠지만, 시궁창이나 화장실을 생활터로 하여 사는 시궁쥐의 현실에서 보면 언감생심의 백일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이오는 수시로 꿈의 장소인 곳간으로 남몰래 들어가보았다.
쥐들의 신분 구분이 엄연하여 곳간이라는 곳은 시궁쥐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성스러운 곳이다. 곳간을 넘보다 자칫 곳간 쥐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시궁쥐는 멸족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곳간을 들어갈 때는 매우 조심하여야 한다. 불결한 곳에 사는 시궁쥐들은 쓰레기나 배설물을 먹고 살면서도 잠시도 경계를 놓치지 않는다. 주위의 소음 등에 민감하여 작은 소음이라도 들리면 먹던 것을 버려두고 잽싸게 달아나 숨어야 한다. 그렇게 불안에 떨며 긴장하여 살아도 생존율이 높지 않다.
그런데 세상은 너무도 불공평하다.
곳간 쥐들은 당최 두려움이나 배고픔을 모르고 산다. 사람이나 고양이가 정해진 시간에만 나타나니 그 때만 피하면 풍부한 먹을거리를 언제든지 마음대로 먹어댈 수 있다. 설령 먹고 있는 중에 사람이 나타나도 그리 당황하지 않는다. 곳간에 나타난 여자 사람들은 오히려 쥐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태연히 제 할일을 하거나 오히려 조금만 위협적인 동작을 취해도 덩치 큰 인간들이 온갖 호들갑을 떨며 달아나 버린다.
그걸 본 시이오는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왕후장상에 씨가 없듯이, 곳간 쥐와 시궁쥐도 원래부터 씨가 다르지 않다. 어디에 살게 되었는가에 따라 쥐의 팔자가 달라진 것이다. 단지 살고 있는 곳의 차이만으로, 부귀와 안전을 누리며 사는 고귀한 쥐의 삶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비천하고 불안하게 삶을 꾸려가는 비참한 시궁쥐의 삶이 있는 것이다.
비록 시궁쥐라 하더라도, 곳간으로 옮겨 살기만 하면 곳간 쥐의 풍요와 안락을 누리지 못할 리가 없지 않는가. 쥐의 잘나고 못나는 것은 그가 처한 곳에 따르는 것이다. 이에 시이오는 반드시 곳간 쥐가 되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그렇게 하여 곳간을 숨어서 들락거리던 어느날,
시이오는 한 구석에 가려져 사람들도 그 존재를 잘 모르는 쌀독을 발견하였다.
쌀독은 표면이 미끄럽고 볼록하게 생겨 쉬이 들어갈 수 없다. 영리한 그는 대들보에서 떨어지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독 속에 용케 들어갔다. 독에는 쌀이 가득하다. 우선 하얀 쌀 속에 머리를 처박고 주린 배를 양껏 채웠다. 배가 부르자 가족들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먹을거리가 이토록 풍부하게 있는데, 굳이 냄새나고 더러운 하수구의 집에까지 갔다가 다시 이 먹이를 먹으려면 되돌아 와야 한다. 더럽고 불안한 집과 가족이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쌀이 지천으로 존재하는 이곳을 집으로 삼아 여기에서 먹고 자고 뒹굴며 편히 지내면 될 것 아닌가.
그 판단은 매우 훌륭한 결정이었다.
쌀독은 배가 부르고 입구가 좁은데다 너무도 견고하고 표면이 미끄러워, 그 속에 있으면 쉬이 발견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발견되더라도 누구든 쉽게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천혜의 요새였다. 그 기막힌 요새 속에서 시이오는 오로지 혼자서 그 엄청난 풍요와 완벽한 안전을 누릴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이 행복에 더욱 감사하게 되었다.
거의 꽉 차있던 쌀을 먹고 내려갈수록 면적은 넓어지니 쌀은 더 많아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 속 환경에도 잘 적응되어 외부의 소음에도 처음처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살이 쪄 몸은 다소 둔해졌지만 아직은 마음만 먹으면 잽싸게 쌀독의 주둥이로 튀어나갈 수도 있다. 다만 가끔 무료하여 형제 가족들이 그리워지고 외로움으로 가슴이 아릴 때가 있었다. 정말 견디기 힘들 때는 자신의 발자국을 남의 발자국인 것처럼 쫒아 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굶주림의 기억과 고양이에게 쫒기며 도망 다녀야 했던 오금저리는 두려움을 생각하면, 외로움이나 그리움, 심심함 따위는 사치에 불과하다. 이 모든 풍요와 안전은 순전히 희한하게 생긴 이 배불뚝이 쌀독 덕분이다. 천연 요새와 같은 쌀독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배포한 인간의 지혜에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주었다.
그러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은 왔다.
꽉 차있던 쌀이 어느새 한 길 정도까지 깊어지니, 더 이상 깊어지면 자력으로는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이 시점에 나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를 결단하여야 한다. 지금의 풍요와 안락은 그 자체만으로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여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춥고 배고프고 불결하고 불안한 과거의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두 번 다시 이 환상적인 낙원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고민은 길게 하지 않았다. 인생 아니 서생(鼠生)이 별 거 있나. 미래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당장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 속의 쌀은 얼마나 버틸지는 몰라도 지금부터도 상당 기간 아니 죽음이 이를 때까지 언제까지나 먹고 지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일단 독 속에서 눌러앉기로 결단을 내렸지만,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가 궁금하다. 그동안 먹어치운 만큼 쌀독 속이 많이 깊어졌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쌀독의 구조 때문에 나갈 수도 내다볼 수도 없다. 가끔 들리는 바깥 소음을 듣고 나름대로 상상을 해보기는 하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도리가 없다. 어차피 무슨 일이 생겨도 달리 어쩔 방법이 없으니, 바깥의 움직임은 무시하기로 하고 아예 귀를 막아버렸다. 세상을 차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마음의 고요와 평화는 누려본 자만이 그 고결한 경지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다른 불편이 생기고 그 불편은 점차 커져갔다.
생명체로서의 생리작용은 피할 수 없으니, 배설물은 먹은 양에 비례하여 쌓여가는 것이다. 그만큼 쌀은 오염되었다. 아직 그 끝을 알 수 없는 양의 쌀이 남아있지만, 유일한 낙인 먹는 즐거움의 질이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삶을 결코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 정도 불편으로 풍요와 안락으로 가득한 이 삶의 가치를 결코 부정적으로 평가하여서는 안된다. 현재의 안락한 삶을 과거의 비참한 생활과 비교하면서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또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조금씩 커져갔다.
이 쌀독이 언제 바닥이 드러낼지 모른다는 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필시 이 쌀독도 바닥이 있을 것이다. 그 시기가 언제 올지를 모르니 불안하다. 쌀독의 바닥은 검은 백조와 같다. 내가 경험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존재 사실이 확인되면 그 충격이야 대단히 크겠지만 그 역시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이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언젠가 존재가 증명되기까지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면 된다. 드러나지 않은 것을 미리 걱정하는 것은 하늘이 무너질까 전전긍긍하는 기(杞)나라 사람의 어리석은 걱정일 뿐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그는 그 불안을 마음속으로부터 잘 몰아내었다.
자신이 모르고 또 안다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은 걱정한다고 해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과 희망이다. 모든 게 잘될 것이라는 강력한 신념만이 모든 불편, 불안 등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모르는 일을 미리 앞당겨서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한다고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할 일이 없겠네’라는 티벳의 속담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생활하더라고, 결국 세상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어느새 쌀보다 배설물이 많아지고 그 속에서 쌀을 골라내어 먹기가 힘들어진다. 그렇게 헤집어 골라내는 과정에 바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바닥이 드러나니 혹 나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위를 올려다본다. 쌀독의 주둥이는 터무니없이 좁고 높은 곳에 있다. 게다가 벽은 위로 갈수록 오므라져 있고, 비대하고 둔한 몸으로 절대 기어오르거나 뛰어오를 수 없다. 한 때 자신을 지켜주어 고마워했던 쌀독이 이제는 절대 나갈 수 없게 가두는 완벽한 감옥이 되어있다.
움쩍할 수 없는 이 기막힌 상황에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이런 요상한 독을 만든 인간을 저주하고, 하필 이런 곳에 쌀을 보관한 인간을 저주하고, 나아가서는 바깥에서 다소 배는 곯더라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을 다른 쥐들을 저주하고, 더 나아가서는 쌀을 오염시킨 배설물을 배설한 자신과 조물주에게도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다 더 이상 골라먹을 쌀이 남아있지 않게 되고 허기가 밀려오니 화를 낼 힘조차 없다.
가만히 지난날을 회상해본다. 쌀독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그 황홀한 기쁨, 한동안 풍요를 마음껏 누리던 때의 영원할 것 같던 행복한 시간, 그리고 조금씩 자라나던 불편과 불안, 그 어느 즈음에 상황을 깨닫고 무언가를 준비했더라면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저 혼자 부른 배를 두드리며 게으름을 부렸던 지난 날들이 후회스럽다. 적당히 먹고 다른 새 쌀독을 찾아 떠났더라면. 하다못해 그 많은 시간에 높이 뛰기 훈련이라도 했다면 쌀독을 뛰어나올 수는 있지 않았을까.
그러다 문득 당두봉갈(當頭棒喝)과 같이 큰 깨달음이 머리를 세차게 때렸다.
순간 허무감을 넘어 평정심이 찾아오면서 머리 속을 울리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소위 현자타임이 온 것이다. 이 모든 결과는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이아닌가. 쌀, 쌀독, 인간, 고양이, 곳간 쥐 등 어느 누구도 이 상황에 책임이 없다. 오로지 자신이 선택한 결과이다. 모든 이들이 이해되고 용서할 수 있다. 이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무엇을 남겼는가를 생각해본다. 다른 쥐들에게 더 너그럽게 베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후회로 남는다. 풍족했을 때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던 가족, 사랑, 우정 등이 모든 걸 잃고 나서야 그 진정한 가치가 가슴 아리게 느껴진다.
그래서 자신의 깨달음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후배 쥐들에게 가르침을 남기고 싶었다.
흐려져가는 영혼을 붙들어 회광반조의 여력으로 쌀독의 벽면에 기록하였다.
‘독 안에 든 쥐의 참회록’은 그렇게 작성되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발견 당시 그의 모습은 매우 평온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한다.
그 통한의 참회록은 누가 어떻게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몇 가지 가르침의 말들이 시궁쥐들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옮겨본다.
-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고통과 불행은 더 큰 법이라네.
다시는 나와 같은 불행한 쥐가 없기를.. ㅠㅠ..
- 쥐의 잘나고 못나는 것은 처한 곳에 따른다.
하수구와 곳간 중 어디에 처할 것인가.
- 모든 귀중한 것들은 쌀독과 같은 곳에 들어있다.
때를 놓치면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된다.
- 너무 좋은 것은 대체로 너무 안 좋은 것이다.
그것들은 상황 변화에 대한 인식 능력과 대처 능력을 거세시킨다.
- 나를 지키주는 요새와 나를 가두는 감옥은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외로운 것이다.
- 쌀독에 들려는 자 그 깊이를 이겨야 한다.
왕관을 쓰려는 자가 그 무게를 견뎌야 하듯이.
- 시작할 땐 항상 끝을 생각하고,
들어갈 때는 반드시 나올 길을 마련해 두라.
- 쌀독 속에서 동일한 쌀을 두 번 먹을 수는 없듯이,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쌀이 달라지거나 적어도 나 자신이 달라져 있다.
-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배부르면 먹을거리를 떠나라. 얼마나 남아있는가는 생각하지 말라.
- 희망은 근거와 함께 하여야만 좋은 약이 된다.
근거가 빠진 희망은 향기로운 독이다.
- 나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내 먹을거리를 스스로 오염시켰다는 것이다.
- 가족, 사랑, 우정 등 가장 귀중한 가치는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제대로 보인다.
- 뛰어라. 앞으로든 위로든 잠시도 쉬지 않고. 날 수 있다면 뛰지 않아도 좋다.
- 배부를 때는 영혼이 빈곤하고, 배가 주리고 나면 비로소 영혼이 풍요로워진다.
- 용서하라. 자신의 구속을 푸는 열쇠는 용서 뿐이다.
출처: https://www.dotomari.com/1322 [허성원 변리사의 특허와 경영이야기]